좌파는 일본인이 맞죠 ? ( 고 이승만 대통령 폄화, 내용 축소가 닮았어요 . ) ‘이승만의 독도 업적’ 축소한 일본의 영토주권관 https://www.msn.com/ko-kr/news/politics/%EC%9D%B4%EC%8A%B9%EB%A7%8C%EC%9D%98-%EB%8F%85%EB%8F%84-%EC%97%85%EC%A0%81-%EC%B6%95%EC%86%8C%ED%95%9C-%EC%9D%BC%EB%B3%B8%EC%9D%98-%EC%98%81%ED%86%A0%EC%A3%BC%EA%B6%8C%EA%B4%80/ar-AA1Rp1dG?ocid=msedgdhp&pc=CNNDDB&cvid=692bea60a3a643f8aa94d3aed4d06b7b&ei=13 영토주권전시관에서 만난 이승만 일본 정부의 영토주권전시관은 일본 측 의도와는 달리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일본에 맞서 독도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업적이 역설적으로 부각돼 있었습니다. 독도는 1945년 일본의 패망(敗亡)과 함께 자동으로 한국 영토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미국의 오락가락하는 입장으로 독도가 ‘다케시마(독도의 일본명)’가 될 뻔한 위험천만한 상황도 있었습니다. 이때 이승만의 강단(剛斷)과 국제적 감각이 빛을 발했습니다. 영토주권전시관은 2020년 한국의 ‘불법 행위’를 강조하면서 ‘1952년 이승만 라인(평화선)’에 대해 이렇게 기술했습니다. “이승만 한국 대통령은 해양주권선언을 만들어 이른바 이승만 라인을 공해상의 광범위한 해역에 일방적으로 설정함과 함께 이 라인 안에 다케시마를 포함했다.” “그 후 이 라인을 침범한 일본 어선을 나포하는 사안이 제주도 남방 어장을 중심으로 다수 발생하게 돼 선원들이 억류되는 문제가 심각해졌다.” 이승만 평화선이 선포되던 1952년은 김일성의 남침(南侵)에 따른 전쟁 중이었습니다. 개전 초기의 절체절명 위기는 면하고 휴전 협상이 시작됐지만, 모든 것이 불확실했습니다. 모두가 38선 근처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런 때에 이승만은 해외 상황을 면밀히 봐가며 국제사회를 놀라게 하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 발효 석 달 전에 평화선을 선포, 독도에 대한 실효적 조치를 취했습니다. 이어서 1954년엔 독도에 등대를 설치했습니다. 경찰 경비대도 파견했습니다. 일본이 이에 항의하는 구술서를 보내왔지만 일축했습니다. 오히려 독도 풍경을 담은 기념우표 3종을 발행, ‘독도는 한국 땅’임을 명백히 했습니다. 이런 역사가 서술된 독도관을 보면서 일본 정부가 이승만을 얼마나 미워했는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식민 지배 청산을 위해 1951년부터 시작된 한일 협상에서는 사죄와 배상을 강하게 요구, 일본이 골머리를 앓았습니다. 재임 시기가 이승만과 겹쳤던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총리는 이승만에게 진절머리를 냈습니다. 그가 가장 싫어하는 인물로 정적이었던 고노 이치로(河野一郞· 고노 다로 전 외무상 할아버지) 농림 대신과 이승만을 꼽은 것은 일본에서는 잘 알려진 얘기입니다. 이승만은 35년간 지도에서 사라졌던 나라 재건을 위해 집권 초기 일제 시대의 전문 관료들을 기용했습니다. 이 때문에 친일파라는 오명(汚名)을 뒤집어썼으나 사실은 일본 측이 상대하기 껄끄러운 인물이었음을 역설적으로 일본의 영토 주권 전시관은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일본 정부는 전시물을 축소하고, 영상 교육관을 신설하면서 이승만의 독도 관련 업적 부분을 축소했습니다. 이전에는 ‘1952년 이승만 라인(평화선)’의 ‘불법 행위’ 가 강조됐지만, 이번에는 ‘샌프란시스코 평화 조약과 한국에 의한 불법 점거’로 바뀌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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